인요한 (존 린튼) - 전라도 사투리 쓰는 白人

Daniel Jeon | 2018.02.12 11:21 | 조회 410
전라도 사투리 쓰는 白人
조상들, 한국에 헌신했지만… 난 한국서 많은 것 받았죠
귀화 前엔 2% 부족했는데 이젠 진짜 '우리나라' 됐다

野黨서 마음 멀어진 이유?
옛 민주당 참 멋있었는데… 
어느 날, 애국가 안 부르고 국기 경례조차 안 하는
세력과 동맹을 맺더라

北 방문한 것만 29차례
北에 구급차 주러 처음 가… “결핵 도와달라”고 하더라
초기엔 北은 CIA로 보고 南선 빨갱이로 봐 힘들어

내 별명은 ‘보세품’
대학시절 ‘미국’ 놓고 논쟁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쟨 美製 아냐, 보세품이야”
모두가 박장대소하더라

은퇴하면 순천 가 살아야제
情 넘치던 시골 온돌방서 사람관계와 도덕 배웠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친구들과 즐겁게 뛰놀던…
"울 아부지 얼굴을 꼭 봐야 한당께."


1984년 4월 11일 새벽 전남 순천 인휴(휴 린튼) 목사의 집. 서울에서 밤늦게 출발해 막 집에 도착한 스물다섯 살 막내아들 인요한(존 린튼)은 아버지 인휴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인휴 목사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을 중심으로 섬과 산간 지역에서 600여 교회 개척에 앞장섰던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 인 목사는 전날 해질 무렵 교회 짓는 데 쓸 자재를 차에 싣고 집을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만취한 운전기사가 모는 관광버스가 인 목사 차를 들이받았다. 장례식에서 만난 한 병원장 말이 연세대 의과대학 2학년생 인요한의 가슴을 후볐다.

"자네 아버지는 한국 사람처럼 살았고, 또 한국 사람처럼 죽었네."

분노가 치밀었다. 한국 사람처럼 죽었다고? 당시 많은 한국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이유 없이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죽었다는 말 아닌가. 구급차만 있었어도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병원을 옮겨다니다 과다 출혈로 택시에 앉은 채 사망했다.

인요한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급차 개발에 매달렸다. 1993년 승합차를 개조해 국내 도로 환경에 맞는 '한국형 구급차'를 제작했다. 그가 개발하고 개량한 구급차는 전국에 퍼졌다.

 그가 지난 15일 사무실에서 투박하고 스스럼없는 모습이 꼭 자신과 같다는 인형을 앞에 놓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겉모습은 완전 미국인인데 입에서는 걸쭉한 호남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이다. 2년 전 귀화해 이젠 100% 한국인이 됐다. 그가 지난 15일 사무실에서 투박하고 스스럼없는 모습이 꼭 자신과 같다는 인형을 앞에 놓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이태경 기자
인요한(55)은 구한말 이후 4대째 한국에서 선교와 의료·구호, 교육 봉사를 하고 있는 린튼가(家) 자손이다. 1895년 한국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이 진외증조부, 유진 벨의 사위인 윌리엄 린튼(인돈)이 할아버지, 휴 린튼이 아버지이다. 그의 형 스티븐 린튼(인세반)은 북한 결핵 환자 돕기 운동을 펼치는 유진벨재단 회장이다. 인요한은 1987년 한국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고, 1991년부터 24년째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2년 전엔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그가 최근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외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인권상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15일 오후 7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능청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80학번 백인 남자. 외모는 외국인이지만 말투나 생각은 속속들이 한국인인 남자. 인터뷰는 4시간 넘게 계속됐다.

―이번에 받은 상의 공적을 보니 북한 결핵 퇴치, 한국형 구급차 도입, 세브란스병원 국제 진료 등 많더라. 그중 어떤 활동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해 보급한 게 가장 크지 않겠나. 그 일로 내가 살면서 한국에서 받은 수많은 혜택을 조금은 갚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버지와 구급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구급차 개발까지 9년이 걸렸다.

"대학 졸업하고 미국에서 4년간 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과정을 마치고 1991년 여름 텍사스에 있던 외삼촌을 찾아갔다. 6·25전쟁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차 부대 대위로 근무했던 분인데, 응급의학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응급 환자를 다루는 새 시스템을 도입해 26년 만에 중증 외상 환자 사망률을 13%에서 3%로 줄였다'고 자랑했다. 그 자리에서 '삼촌, 구급차 한번 태워주세요' 했다."

―실제로 타보니 배울 게 많던가.

"그 텍사스 촌구석에서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 잘 구축된 시스템으로 환자를 살려내고 있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훨씬 똑똑한데 왜 이런 걸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국내엔 구급차도 별로 없었나 보다.

"있긴 했는데 장비가 없었다. 차로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전부였다. 귀국한 뒤 순천 집 뒷마당에서 구급차를 만들었다. 15인승 승합차를 사서 운전석 빼고 내부를 다 뜯어냈다. 목수와 철공소 직원을 불러 미국에서 봤던 구급차 내부 구조를 만들고 의료 장비 30여개를 달았다."

―만들어놓고 보니 괜찮았나.

"크기는 작았지만 내부를 알차게 만들었다. 자동차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골목길과 달동네, 시골길을 달릴 수 있었다."

―보급하는 문제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사실 첫 구급차는 아버지께 바친다는 생각이었기에 처음엔 마당에 그대로 놔뒀다. 어느 날 순천소방서장이 찾아와 구급차를 주면 환자를 구하는 데 쓰겠다고 하더라. 그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고, 아세아자동차가 대량 생산을 제안했다. 수백 대를 만들었다. 1994년에는 한 중견 기업인이 더 좋은 구급차를 만들자고 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산업스파이처럼 사진 찍고 정보를 얻어왔다. 이듬해 새 모델이 나왔고, 5000여대를 만들었다."

―구급차만 있다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순천소방서에 줄 때 차만 준 게 아니다. 미국 외삼촌과 응급구조사들을 초청, 6주 동안 순천소방서 구조대원들을 교육했다. 과정을 마친 뒤 텍사스 주정부가 발급한 거라면서 수료증을 줬다. 실제로는 외삼촌이 서명한 것이다. 그렇게 국내에 처음으로 응급 구조 시스템과 전문 인력이 탄생했다. 구급차를 보면 지금도 행복하다. 내 자식 같다."

인휴 목사는 엄격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항상 검정 고무신을 신고 교회 개척에 몰두했다. 테니스 코트만 한 대형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한국 사람 누구나 교회에 가고 싶으면 걸어서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삶을 어릴 때부터 이해했나.

"못 했다. 한번은 결핵 병원에서 행패 부리는 환자가 아버지 얼굴에 가래침을 뱉는 걸 봤다. 처참했다. 내 얼굴이 빨개졌다. 이 일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지만 6개월 후 그 환자가 죽기 직전 몰골로 병원에 찾아왔다. 부모님도 울고 환자도 울더라. 그때 처음 부모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삶을 살려면 생활도 엄격해야 했을 것 같다.

"중학교 때 아버지와 선교사 유적지를 찾아 겨울 지리산을 갔다. 운동화가 찢어져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오고 정말 추웠다. 발이 다 얼어서 울었는데 '이 정도도 못 참느냐'며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허리띠로 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날 부를 땐 '이놈이, 이놈이' 그러셨다. 농담으로 내 성이 '이'씨이고, 이름이 '놈이'인가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한국 사람들 삶의 방식을 존중하라고 했다. 사는 방법이 우리와 다를 뿐 더 좋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1000번도 넘게 들었다."

 인요한 가계도
◇"나는 순천산(産) 보세품"
대학 시절, 신촌의 한 주점.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인요한이 말싸움에 휩싸였다. 민주주의, 인권, 미국에 대해 얘기하다 한 친구가 "인요한, 도대체 미국은 왜 그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그가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대꾸하자 그 친구는 "야 인마. 너 미제(美製)잖아. 아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아냐, 미제 아냐. 쟨 보세품이야."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살면서 별명이 3개였다. 병원에 외국인 올 때 상대하는 '얼굴마담', 병원 건물 신축 공사 때 온갖 잡일 다 한다고 해서 '국제 시다바리(뒤치다꺼리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이 보세품이다. 이 중 보세품이 제일 맘에 든다."

―보세품이라면 수출용으로 만들었지만 흠이 생겨 불량품으로 판정받은 제품이란 뜻인데.

"내가 생긴 건 미제인데 뭔가 좀 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 아니냐. 하하.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가 아니란 뜻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전혀. 누구도 내게 낯을 가리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과 맨날 어울려 놀았다. 거울 보지 않으면 겉모습이 다르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개울에서 발가벗고 물놀이할 때 친구들 중에서 나만 포경수술 한 정도가 달랐다고 할까."

―꽤 개구쟁이였나 보다.

"오후 2시만 되면 친구들 학교 앞으로 갔다. 배식 나온 옥수수빵 나눠 먹고 천지사방 싸돌아다녔다. 유진벨재단 하는 둘째 형이 '요한이는 선교부 담을 넘어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애였다'고 할 정도였다. 서리도 많이 했다. 밤, 고구마, 감, 물앵두…. 논밭에서 불 피우고 놀고. 어머니한테도 많이 혼났다."

―얼굴은 미국인이고 말은 전라도다. 정체성 혼란도 있었을 텐데.

"난 한국인의 감정을 갖고 있고, 한국 문화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다. 한국을 떠나서 산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난 진짜 순천산이다."

―1960년대 순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1970년대엔 대전에서 중고등 과정 외국인학교를 다녔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남자들이 군대 얘기 많이 한다. 못 먹고 힘들고, 졸병 땐 맨날 얼차려도 받고…. 그런데도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없을 때 없는 대로 나눠 먹는 사람의 정, 그 따뜻함이다. 나 어릴 적엔 동네 사정을 전부 다 알았다. 누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누가 결혼했고, 아기 낳고. 서로 관심이 많았다."
◇마침내 한국인 되다
그는 2012년 초 특별 귀화자로 선정돼 '완전한' 한국인이 됐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지 53년 만이었다.

―왜 굳이 귀화하려 했나.

"미국서 죽을 것도 아니고, 여기서 뼈를 묻을 거 아닌가. 귀화하지 않고는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2% 부족했다. TV에 나가서 얘기해도 박력이 없었다. 지금은 내가 '우리나라, 우리나라' 하니까 사람들이 웃는다."

―어머니 반대가 심했다고 하던데.

"어머니가 진주만 폭격 세대다. 아주 강한 미국 애국주의자이다. 속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선 당신은 다문화 가정 1세대다.

"그렇다. 우리는 다문화 가정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문화 가정을 품는 건 통일을 준비하는 연습이다. 북한은 그동안 우리와 너무 다른 길을 너무 멀리 갔다. 둘이 합치려면 다름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니 뭐가 달라지던가.

"나는 귀화한 사람이다. 애국가가 중요하고 태극기가 소중하다. 태극기 앞에 설 때 엄숙하고 가슴이 짜릿하다. 오랫동안 지지했던 지금 야당 쪽과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야당과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다니 무슨 뜻인가.

"어느 날 보니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 세력과 동맹을 맺더라. 통합진보당 같은 무정부주의자들 말이다. 서양에서는 국가 반역이다. 국회 밖에선 상관없다. 하지만 국가 기밀을 다루는 정치권에 들어오면 안 된다. 얼마 전 미국 국회의원에게 물었다. 미국에 국기에 경례 안 하고 국가 안 부르는 정치인 있느냐고. 나를 정신병자 보듯 하더라."

―이전엔 야당의 어떤 점을 지지했나.

"옛 민주당이 멋있는 일을 많이 했다. 유신과 싸우고 광주 민주화 운동도 하고 민주주의에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식 때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초청했다. 위대한 거다. 게다가 난 전남 순천 출신 아닌가."

―대학 1학년 때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통역을 했던데. 어떻게 된 건가.

"학교가 휴교하길래 고향에 내려갔다. 광주에 대한 얘기가 너무 많아 직접 가보고 싶었다. 서울대 다니는 친구와 둘이 갔다. 나는 미 대사관 직원이라고 하고, 그 친구는 통역이라고 했다. 검문소 7개를 지나 시내에 들어갔다가 외국 기자들을 만났고,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했더니 통역을 해달라고 한 거다. 이후 몇 년 동안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한국 형사에게 앞으로 5년 동안 광주에 대해 입을 안 열 테니 날 놔두라고 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문무대를 갔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나 살기 위해서 광주를 배반했구나. 가롯 유다 같았다."

그는 지금의 기독교, 대형 교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언젠가 언더우드 가문 4세손 피터 언더우드와 만났다. 대형 교회, 돈 밝히는 교회 보면서 '우리 조상이 이런 걸 위해서 한국에 왔나' 하고 한탄했다."

―한국 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

"진리에 관심이 없다. 목사들이 낮아져야 하는데 자꾸 높이 올라가려고만 한다."

 그는 구급차를 볼 때마다 “자식을 보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대학 시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 이후 구급차 개발에 뛰어들어 1993년 우리나라 도로 상황에 맞고 응급 의료 장비를 갖춘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는 구급차를 볼 때마다 “자식을 보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 이태경 기자
◇북한에선 CIA, 남한에선 '빨갱이'
그는 북한을 1997년 처음 가봤다. 어머니가 북한에 구급차 한 대를 갖다 주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세운 형 인세반은 2년 전부터 북한 식량 지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순천기독결핵재활원장인 어머니(인애자·로이스 린튼)는 평생을 순천·광주 지역 결핵 환자 돌보는 데 바쳤다. '한국 결핵인들의 어머니'라고들 했다. 이런 공헌을 인정받아 1996년 호암상을 받았는데 상금 5000만원을 모두 내놓으시면서 '구급차 한 대 마련해 북한에 갖다 주라'고 하시더라. 이듬해 형(인세반)과 어머니를 모시고 방북했다."

그는 지금까지 북한에 29번 다녀왔다.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북측 대표 김영남에게 구급차를 갖다 줬더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더라. 어머님이 '아들딸 여섯 중 셋이 결핵을 앓은 적이 있어 그 일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측으로 공문이 왔다.'우리도 결핵문제가 심각하니 도와달라'고 하더라. 이후 유진벨재단은 북한 결핵 환자 돕기 사업에만 전념했다. DJ 정부 출범 이후 7년 동안에만 후원금이 350억원 들어왔다."

―북한 사업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초기엔 북쪽에서 CIA로 의심받고 남에서는 빨갱이 취급 받았다. 미국에 가서 살 수도 없고. 에라, 어디 한국 사람 많은 제3국에 가서 살까 한 적도 있다."

유진벨재단은 세계보건기구(WHO)와 지역별 역할 분담을 통해 평양과 평안남·북도, 남포시 등 북한의 3분의 1 정도에서 결핵 퇴치를 맡고 있다. 지금까지 치료한 북한 결핵 환자는 30만명을 넘는다.

―북한 결핵이 얼마나 심각한가.

"1960년대 중반 우리 상황을 감안하면 그쪽 환자가 100만명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약에 내성이 생긴 '다제내성결핵' 환자가 많다는 것이다.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병이다. 약이 듣지 않는다."

―도울 방법이 없을까.

"결핵 배양 시설이 가장 시급하다. 객담을 받아서 배양하고, 어떤 결핵약이 통하는지 알아내는 시설이다."

―요즘 북한 식량 사정은 어떤가.

"쌀농사는 괜찮았는데 밭농사는 100년 만에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옥수수 농사가 엉망이 됐다. 내년 2월, 3월 되면 식량 100만t은 부족할 거다."

―북측 사람과 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편하다. 그쪽은 공산당, 나는 기독교인이다. 서로 다른 걸 인정하면 편하다. 오히려 남에서 여대 앞에서 핑크 공산당, 압구정에선 오렌지 공산당이 판치는 게 더 문제다. 제대로 모르고 겉만 보고 떠든다."

◇은퇴하면 순천으로 돌아갈래
그는 '의료 한류화'에 힘을 쏟겠다고 했다.

"언젠가 사우디 왕족이 환자로 왔는데, 전립선암과 디스크 수술 받고 열흘 입원하면서 1억6000만원을 냈다. 이거다. 장사 되겠구나 생각했다."

―주변국에 비해 경쟁력 있겠나.

"중국이 철강·자동차·조선·IT는 5년 안에 따라올 수 있지만 의료는 20년 이상 걸린다. 마라톤 선수 같으면 안전하게 앞선 상황이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내 외모는 천생 미국인 아닌가. 한국 의료계에도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걸 이용해도 좋지 않겠나."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우리 조상은 한국에 많이 헌신했지만 나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받았다"고 했다. 의사가 됐고, 최연소로 세브란스 병원 부서장이 됐고, 한국인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온돌방 도덕'과 '정'을 알게 된 것이 피눈물 나게 고맙다고 했다.

"옛날 시골 온돌방에는 정이 흘렀고, 그곳에서 사람 관계와 도덕을 배웠다. 안타깝게도 중앙난방과 TV 때문에 그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그는 '은퇴하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한 시간도 서울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순천 가서 살아야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제.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그의 얼굴이 해맑아졌다. 

            장일현 기자 인&아웃 에서-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간증 게시판

위로